마블 드라마 중에서도 ‘로키’ 시리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방향을 바꾼 중요한 작품입니다. 기존의 영화들이 슈퍼히어로들의 개인적 이야기나 팀의 전투에 집중했다면, 로키는 시간, 공간, 정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멀티버스 세계관을 여는 열쇠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TVA(Time Variance Authority), 신성한 시간선(Sacred Timeline), 그리고 변종(Variant) 개념은 마블 세계관 전체를 다시 쓰게 만든 혁신적인 설정이었죠. 이번 글에서는 로키 시리즈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들을 중심으로 전체 구조를 총정리합니다.
MCU 세계관을 바꾼 조직, TVA의 정체
TVA(Time Variance Authority)는 로키 시즌1에서 처음 등장하는 비밀스러운 조직입니다. 이 기관의 주요 임무는 ‘신성한 시간선’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인데, 쉽게 말해 정해진 하나의 시간 흐름을 벗어나는 사건이나 존재를 감지하고 제거함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TVA는 외부 시공간에 존재하며, 기술과 과학이 혼합된 독특한 분위기의 사무국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조직은 단순한 과거/미래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선 중 ‘정상’이라고 판단되는 한 줄기의 시간 흐름만 유지하려고 하죠. 로키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테서랙트를 들고 사라지자마자 TVA 요원들에게 체포당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TVA가 그저 시간선의 경찰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권리를 행사하는 절대적 조직으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로키는 여기서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고,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시즌1 후반부에 이르러, TVA의 진짜 배후가 ‘He Who Remains(그 남자)’라는 인물임이 밝혀집니다. 그는 수많은 멀티버스 전쟁을 종결하고, 오직 하나의 시간선만 유지하기 위해 TVA를 설계한 존재로, 이후 마블 페이즈5의 메인 빌런인 '캉(Kang the Conqueror)'의 변종 버전으로 드러나죠. 이는 단순한 반전 그 이상으로, 향후 MCU 전체의 빌드업과 연결되는 장대한 복선입니다.
신성한 시간선 vs 분기된 현실 – 멀티버스의 본격화
로키 시리즈는 기존 마블 영화에서 흐릿하게 표현되었던 시간 개념을 체계적으로 다듬은 작품입니다. 핵심은 ‘신성한 시간선(Sacred Timeline)’이라는 개념으로, 이는 TVA가 유지하려는 유일한 정해진 역사입니다. 이 시간선을 벗어나는 선택이나 사건이 발생하면 새로운 '분기(branch)'가 생겨나고, 이 분기가 방치되면 완전히 다른 현실, 즉 새로운 우주가 탄생합니다.
이 설정은 단지 시공간 개념의 확장을 넘어, ‘선택’이라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죠. 실비(여성 로키)는 TVA가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수많은 생명을 말살한다고 보고, 그 본질에 의문을 품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결국 시즌1의 마지막에서 실비는 He Who Remains를 죽이고, 신성한 시간선을 붕괴시키며 수많은 분기 세계가 폭발적으로 생겨납니다.
시즌2에서는 이러한 분기들이 통제 불가능한 속도로 확산되며 TVA조차 관리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간의 구조’가 물리적 차원이 아닌 존재론적 개념으로 접근되기 시작하죠. 즉, 시간은 선형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의 결과가 끊임없이 겹쳐지는 입체적 개념으로 재해석됩니다.
로키 시리즈는 이런 시간선의 복잡한 구조를 시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적 장치와 대사, 그리고 스토리 전개를 통해 직관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를 통해 마블은 단지 캐릭터 기반의 스토리에서 벗어나, 세계관 기반의 스토리텔링으로의 확장을 본격화하게 된 것입니다.
변종은 파괴자일까, 가능성일까?
로키 시리즈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바로 ‘변종(Variant)’입니다. 변종은 기존의 시간선에서 벗어나 ‘허가되지 않은 선택’을 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로키가 바로 그 대표적 예시인데, 그는 원래 죽었어야 했지만 테서랙트를 들고 도망치는 선택을 함으로써 변종이 됩니다.
시리즈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로키 변종들을 만나게 됩니다. 키드 로키, 프라우드 로키, 클래식 로키, 악어 로키, 여성 로키(실비) 등,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성격, 배경, 동기를 지니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 로키라는 캐릭터 자체의 본질과 가능성이 탐색됩니다.
여기서 변종이 단지 시스템에 의해 제거되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이자 ‘다양성의 상징’으로 묘사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는 단순히 로키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 마블이 앞으로 선보일 멀티버스 속 다양한 캐릭터 변형, 성별, 인종, 세계관 설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장치가 되기도 하죠.
시즌2에서는 변종들이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며, TVA 또한 그들을 억압하는 조직이 아닌 협력의 공간으로 변모합니다. 로키 자신 역시 더 이상 악당이 아닌, 시간선의 균형을 지키는 책임 있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마블 세계관의 중심축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로키 시리즈는 마블 세계관에서 단연 가장 복잡하면서도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단순한 히어로물이 아닌, 세계관 재구축의 교과서라 할 수 있죠. TVA라는 조직의 배후, 시간선의 다층적 구조, 그리고 변종이라는 개념은 앞으로 MCU가 어떤 방향으로 확장될지를 암시합니다. 이 시리즈는 단순히 '로키'라는 캐릭터의 개인적 성장기를 넘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정해진 것인가, 선택의 결과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철학적 깊이까지 더합니다. 아직 로키 시리즈를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이 정주행하기 가장 좋은 시점입니다.